숭고를 잉태하는 시뮬라크르

플라톤은 이데아를 예찬했다. 하지만 그토록 우러렀던 이데아 안에 스스로를 파괴하는 악마적 속성이 존재한다는 것을, 그는 알고 있었을까. 바카 작가는 그 파괴의 그림자를 낯익은 듯 낯익지 않은 방식으로 드러낸다. 얼핏 보면 판화를 연상시키는 그의 작품들은 기실 판화와는 판이하게 다르다. 판화의 복제판들은 원본과의 거리에 따라 가치가 매겨진다. 반면 작가는 대상의 형태와 색을 단순화해서 추상한 뒤 한바탕 유희의 장으로 끌어들인다. 이 놀이판에서 복제본 사이의 우열은 그 의미를 잃게 된다. 한마디로 판화는 유사(ressemblance)의 원리에 서있지만 작가는 상사(similitude)의 놀이를 하고 있다. 살아 있는 멸치, 재현된 멸치, 재현을 복사한 멸치, 복제의 복사본을 찍어낸 멸치, 이 반복의 놀이를 플라톤은 싫어했겠지만 우리는 외려 멸치들의 놀이 ‘안에서’ 원본의 의미를 뛰어넘는 새로움을 경험한다.

상아로 인간을 만들어서 생명을 불어넣었다는 피그말리온. 상아의 딱딱한 가슴이 피그말리온의 손가락 아래서 온기를 띠기 시작할 때 둘 사이의 경계는 허물어진다. 상아는 더 이상 재현의 대상이 아니다. 멸치는 우리에게 무엇인가. 멸치는 어디에 있었는가. 식(食)의 대상. 미각의 객체로만 존재했던 멸치. 그는 상아다. 그 멸치가 작가를 거쳐 세계로 들어온다. 상아의 온기가 존재하는 세계. 태양의 제단을 돌며 기도하고, 수(樹)의 잎이 되고 바람이 되고, 전철 속 덩어리가 되는 세계. 그 곳에서 멸치에 대한 인식론적 베끼기는 존재론적 닮기로 승화한다. 멸치는 감각의 위계 아래 놓였던 미각의 구속에서 벗어나 온몸의 촉각으로 환입된다. 저게 ‘멸치’인지 아닌지는 중요하지 않다. ‘지금껏 한 번도 본 적 없는, 한 번도 모습을 드러내지 않았던 멸치’를 우리가 ‘지금’ 대면하고 있다는 ‘사건’만 남는다.

마그리트가 재현으로써 재현을 파괴한 것처럼, 작가는 ‘주체’의 객체화로써 ‘객체’를 객관화하는 우리의 관성을 비튼다. 그것이 바로 ‘내 좇는지 제 좇는지’ 알 수 없는 세계다. 작가의 이러한 세계관은 ‘트랜스 아방가르드’에 속하는 카를로 마리아 마리아니의 「손이 지성에 순종한다」를 연상시킨다. 그 세계는 이미타티오(imitatio)를 벗어나 미메시스로 나아가는 ‘존재체험’을 매개한다. “현대 예술은 눈에 보이는 것을 재현하는 게 아니라 눈에 보이지 않는 것을 가시화한다.”라는 파울 클레의 문제의식을 리얼리티 밑에 있는 더 근원적인 리얼리티에 대한 추구로 읽는다면, 작가는 ‘그 리얼리티’를 ‘별 볼일 없는 멸치’의 놀이를 통해 실현하고 있다. 그 리얼리티에 숭고라는 이름을 붙여도 무방하지 않을까. 시뮬라크르가 숭고를 잉태하는 역설.  

작가는 묘한 줄타기를 즐기는 듯하다. 무수한 반복, 그 반복이 가져오는 차이 속에서도 하나의 미로 합일되는 작품들에서 고전주의의 정점에 서있던 헤겔 미의식의 일면을 엿보게 된다. 이 모던적인 자취, 모던과 탈근대의 경계를 앞으로 어떤 식으로 작품 안에 구현하고 즐길지 궁금하다.


- 김시혁 2017.05